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프레데리크 그로책세상

저자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파리정치연구소의 정치철학 담당 교수다. 철학은 오래된 도서관 책상에서 고뇌하는 지루한 학문이 아니라, 자연과 연결되며 사유하는 학문임을 강조한다.

프레데리크 그로

1. 책 소개

저자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파리정치연구소의 정치철학 담당 교수다. 철학은 오래된 도서관 책상에서 고뇌하는 지루한 학문이 아니라, 자연과 연결되며 사유하는 학문임을 강조한다.

니체, 칸트, 소로, 랭보, 루소, 벤야민등 다양한 철학가, 사상가, 문학가들의 생애를 인용하여 ‘걷기 철학’의 이점을 다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철학가들의 방대한 생애와 업적을 걷기와 관련하여 간략하게 압축하여 설명했다는 점이다. 동시에 이들의 걸으면서 사유한 일화를 자세하게 다루며, 이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전개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있다.

저자의 문체는 수사학적인 색체가 짙다. 특히 걸으면서 사유한 바를 표현할 때, 신비주의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싶지만, 애써 주류 학문 범주 안에서 안전하게 표현하려는 의지가 느껴진다.

2. 서평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누구를 위한 것인가

딱딱한 철학 용어, 화려한 문체, 방대한 배경지식의 요구.

실용도서만 편식한 탓인지, 읽기 상당히 버거웠다. 무언가 깊은 것을 전달하려는 저자의 의도는 알겠으나,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두 발로 사유한 바를 알기 위해선 독해력이 출중해야만 하나?’, ‘걸으면서 사유하는 건 결국, 훌륭한 지성인들만의 전유물에 불과한가?’라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저자의 현학적인 문체는 ‘우리 철학가들은 일반인들과 달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잠시 책을 덮고, 저자를 내 식대로 분석해봤다.

‘저자는 철학에 수십 년을 몸담은 중년의 교수야. 생각을 너무 많이 했겠지. 일반인의 시각을 까먹은 지는 이미 오래됐을 거야. 오히려 그가 사유한 바를 그대로 말하지 않고, 일반인의 시각으로 내려와 설명하려고 했다고 생각해봐. 정보의 손실이 일어나 본인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지 못했을 거야. 내가 그의 시선에 맞춰 올려다 봐야해.’

그렇게 다시 책을 읽기로 마음먹었다. 이해하기 힘든 문장은 여러 번 훑어보고, 소리 내어 읽어보기도 했다. 몇 번의 노력 끝에, 저자가 표현하려는 것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 울림은 생각보다 깊었다.

버린 자만이 누리니

저자가 걸으면서 사유한 표현들을 읽다보니, 걷기에 숨겨진 비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인하고 싶어졌다. 바로, 집에서 멀지 않은 등산로를 향해 걸었다. 물도, 휴대폰도 다 놓고 나왔다. 두 손이 정말 자유로웠다. 바로 그때, 나는 지금까지 ‘그냥 걸었던 적’이 없었음을 알아차렸다. 반드시 목적지가 있었고, 만날 사람이 있었고, 채워야 할 운동량, 정리해야할 감정이 있었다. 목적 없이 걸어보니 생각보다 낯설음의 덩치가 컸다. 자유로움을 만끽하기 어색했다. 복역이 단축되어 조기 출소한 모범수의 기분은 이런 걸까. 뭔가를 손에 쥐고, 가방을 매어야 편해질 것 같다.

저자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걸을 때 누릴 수 있는 자유다.’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며 도심 속을 헤쳐 나가는 대학생, 머릿속에 각인된 ‘나’를 버려야 걸음이 주는 자유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정체성을 버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가장 어려운 일이다.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려면 모든 걸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걸으면서도 계속 ‘나’가 말을 한다. ‘걸으면서 뭘 느꼈다고 써야하지’, ‘공부해야하는데 지금 뭐하고 있지?’, ‘이번 주까지 끝내야 하는 게 뭐가 있었지?’

다행히 생각을 흘려보내는 방법을 꾸준히 연습해 온 덕에 이런 생각들에 매몰되진 않았다. 경치만을 즐기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문뜩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멈춰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요했다. 나뭇잎들이 바람결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편안했다. 이윽고 주변 시야가 한 눈에 들어오면서, 풍경 전체가 눈에 들어왔다. 색다른 감정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말을 건다.

“가만히 서서 뭐해, 가던 길 가” 젠장, 머릿속의 ‘나’였다. 그의 속삭임에 대꾸할 생각도 못한 채 발걸음을 옮겨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저자가 말한 ‘걸으면서 사유하는 철학’은 내가 느낀 찰나의 감정과 비슷한 선상에 있지 않을까. 걸으면서 대자연이 주는 현존의 크기를 상상해보니 저자가 왜 그렇게까지 화려하고 심오하게 표현했어야만 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갔다.

왜 철학가의 끝은 비참할까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이 주는 고요함을 즐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또 다시 현실이다. 해야 할 일은 그대로고, 책상 위에 책과 프린트는 쌓여있고, 그 옆엔 묵직한 가방이 왜 이제 왔냐고 추궁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현실이 지겹다는 뜻은 아니다, 여운이 깊은 영화를 보고 상영관을 나왔을 때, 현실세계에서 느끼는 어색함의 감정과 비슷하다.

일평생 사유하며 평생을 바친 근대 철학가들은 현실로 돌아왔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대자연에 느낀 초월적인 황홀함과 진리와 비교하여, 교육환경, 경제상태 등의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동물과 같은 의식 상태를 가진 현실적인 사람들을 마주했을 때 말이다. 그 간극의 차이는 인생의 덧없음과 같이 허망함으로 다가왔을까? 너네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우월감으로 다가왔을까? 니체는 말년에 자신이 신이라고 착각을 했다. 그렇다. 정신병자가 되었다. 랭보도, 루소도 말년이 비참하다. 누구보다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며, 대자연의 선물상자를 열어본 사람들인데, 왜 끝은 비참할까?

그 이유는 바로 자연과 현실의 간극에 있다고 생각한다. 대자연과 연결되어 초월감을 느껴도 현실은 현실이다. 우리는 인간이다. 철저히 생명체의 메커니즘을 따른다. 현실세계를 도외시하고, 비물질세계라고 일컫는 정신세계에 빠지게 되면 나와 신을 동일시 여기는 오류를 저지르게 된다. 니체를 통해 대자연과 연결되어 현존하는 것만이 인간의 최종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분석심리학자 칼 융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려고 한다.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경외심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신의 경지에 오른 것 같은, 현존이 안겨다 주는 황홀함을 맘껏 느껴도 우리는 한 낯 인간에 불과하다. 걸어 다닐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세상 별 거 있나’라는 푸념을 하고 있거나,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야’라는 오만함에 빠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당장 대자연을 향해 끝없이 걸어보자. 드높은 절벽, 끝없이 펼쳐진 대양, 휘양 찬란한 폭포 줄기를 보며 대자연의 웅장함을 느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