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맞은 감정들

조우관가나출판사

조우관 저자, 이름 때문에 남자 작가님인줄 알았다

조우관 저자, 이름 때문에 남자 작가님인줄 알았다

산타는 왜 우는 애들에게 선물을 안 주는 걸까?

'아이는 어른만큼 언어능력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조리 있게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때문에 울음은 아이의 정체성이다. 이런 아이에게 울지말라고 하는 것은 어른에게 어떤 감정이 일어나더라도 아무런 표현도 하지 말라는 주문과 다를 바 없다. 울지도, 장난치지도, 토라지지도 말라는 어른 입장에서 키우기 편한 아이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아이들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이런 특성을 없애야지만 어른들이 편해진다. <이퀄리브리엄>에서 독재정부가 시민을 통제하기 수월하도록 모든 감정을 소멸하려고 했던 것처럼. '

1. 이 책은 100% 사실로 받아들이면 위험하다

인간은 태곳적부터 생존과 번영을 위해 하루하루 고군분투하며 살아갔다. 더욱이 공동체 생활을 하면 발생하는 여러 사건들이 많이 나타난다. 여기서 개인의 감정을 숨김 없이 드러내고 사는 것이 가능할까? 어느 정도 감정을 숨긴채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저자의 논리의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전통사회는, 특히 부모는 단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서만 아이의 감정을 죽이는 악역으로만 비춰진다. 인류 탄생 이래로, 당장의 목숨을 걱정하지 않고 살아가던 시대는 없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엄청난 편리함은 감정을 숨기고 각고한 노력의 댓가로 일궈낸 것이다.

물론 감정의 역학을 모르는 일반적인 부모가 아이의 감정을 억압을 해온건 일부분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만약 당신의 3살배기 아기가 빨간불에 뛰어가는 걸 보고도 그 자리에서 아주 침착한 상태에서 '뛰어가고 싶었어~?', '위험해서 안 그러는 게 좋아~'라고 하는 게 가능한가? 잔뜩 흥분한 나머지 '그런 장난치면 못써!'라며 당신의 감정에 충분히 이입해서 애를 다그칠 것으로 충분히 모습이 상상간다. 실제 말을 그렇게 하진 않더라도, 말투와 억양에 녹아들어가 있는 놀람에 근거한 화는 당신도 제어하지 못할 것이다. 양육자인 당신도 감정이 있고, 실제로 절대자의 강력한 경고는 아이를 외부세계로 부터 안전하게 지켜내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독재정부가 시민을 통제하기 수월하도록' 식의 표현은 독자들이 감정이 무엇인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돕기보단, 부모나 사회에 원망할 수 있는 막강한 무기를 쥐어주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어린시절 나의 감정을 억압했던 부모 혹은 사건의 속성을 그대로 보고,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사회구조적인 설명을 덧붙여주었으면 어땠을까? 인생의 병목현상의 이유를 외부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또 다른 카르마를 형성하여 전체적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긍정주의의 환상

'긍정의 진짜 뜻은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이다. 그런데 동기부여가 혹은 자기계발 작가들이 노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의지력 드립을 합리화하기 위해 긍정을 주로 주장해온 결과 우리는 긍정의 의미를 오해하게 되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나의 노력과 긍정적 생각에서 기인한다면, 나의 가난에도, 몹쓸 부모에게도, 국가 제도의 부조리와 사회적 모순에도, 어떠한 책임도 물을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긍정주의 내지는 긍정 만능주의를 경계해야만 한다.'

2. 이 책은 2021년에 출판됐다.

그런데 아직도 저자는 자기계발 작가들이 노오력, 의지 드립만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자기계발 분야에 오래 머문 독자로서, 자기계발 분야가 결코 노력, 의지 이런 것들만 강조하지 않는다. 2000년대 초반 삼류 작가들이 쓴 책을 보고 과잉 일반화를 하는 것이다. 요즘 유명한 자기계발서적은 꽤나 정확하고 정교한 이론을 개인의 성장을 위해 접목시키고 훈련해주는 내용들이 알차게 들어가있다. 저자님처럼, 문제 제기만 하고 '~이런식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며 꼬리를 내리지 않고.

실제적 자기, 이상적 자기, 당위적 자기

'실제 나의 모습이 '당위적 나' 혹은 '이상의 나'와 다를 때 불만족, 우울, 슬픔을 느낀다. 가끔 부모는 아이에게 조건적으로 가치를 부여한다. 부모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나쁜 아이로 낙인찍혀서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왜곡하거나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모두 생존에 대한 욕구이자 본능으로부터 발동한다. 아이는 부모의 가치를 자신의 가치로 내면화하고 부모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가치만을 추구한다. '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감정전문가다.

'또 부모 탓인가? 새로운 통찰력은 기대할 수 없는거야?'

잠깐 내가 왜 저자를 반박하고 있지? 저자는 감정전문가다.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기 위해 책을 읽는데, 너무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왜 그렇지?

나는 어떤 현상을 자신만의 인지도식(스키마)에 취해 확신의 어조로 주장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저자의 '이게 정답이야!'라는 자신만만한 말투는 내 뇌의 방어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내가 자신만만한 사람들에 대해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는 이유는 사기꾼 검증 시스템이 정교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저자는 인간자체의 본질이라는 큰 그림은 보진 못하더라도, 감정에 대해선 나보다 훨씬 많이 안다. 저자의 인지도식이 감정에만 치우쳐져있어 그 논리의 맹점을 내가 공격하고 있다. 이는 나에게 크게 도움이 되질 않는다. 나의 인지도식에 없는 저자의 인지도식에 있는 그 부분을 보고 배우는 것으로 방향을 바꿔야 겠다.

유시민 작가도 이런 말을 했다.

" 비판은 마지막에 해도 돼요. 우선은 저자의 생각을 이해해봐요."

감정을 함부로 판단해선 안 되는 이유

감정자체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저 일어나고 있는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감정과 상황이 만나는 현장을 보며 종합적으로 판단해야지 특정한 감정 하나만을 갖고 사람의 인격과 됨됨이를 평가하기에는 참고자료가 너무 부족하다. 부모는 자신이 부정적인 사람이라 아이가 나를 보고 배웠다는 의심에서 벗어나고자, 혹은 내 아이가 어디 가서 부정적인 아이로 비칠까 봐 이 놀라운 기술을 없애버리고야 만다.

우리가 감정을 긍정과 부정으로 나누는 순간, 긍정의 감정은 옳은 것으로, 부정의 감정은 그릇된 것으로 여겨지고 그 결과 어떤 감정에는 자유롭고 어떤 감정에는 부자유함을 넘어 그것을 억압하는 지경에 이른다. 긍정적을 편한이나 익숙한으로 부정적을 불편한이나 익숙지 않은 으로 바꿔 부르자고 제안한다.

우리는 감정이 왜 일어나는지를 따져 물으며 개인을 탓하는 대신, 무엇 때문에 그러한 감정이 생겨났는지 상황과 환경을 궁금해야한다.

우리를 편하게 만드는 감정은 그냥 편하게 누리면 되고,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감정은 불편한 본직적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탐구하면 된다.

감정은 신호등과 같다. 슬퍼하라는 신호에 애써 웃으면 내면의 신호등이 완벽히 망가진다. 도망가하는 신호에 화를 내며 싸우면 말이다.

불확실하고 미스터리할수록 우리는 발견해야 한다. 길을 전혀 잃어버리지 않는 삶은 지겹고, 길을 되찾아오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의 삶은 안전하지 않다. 발견하고 찾는다는 것은 이 두 가지 세계를 서로 잇는 일이다. 감정에 대한 감각을 하나하나 발견함으로써 자신과 감정이 얼마나 무한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깨닫기를, 자연의 일부로서 나의 방대함을 음미하기를 빈다.

4. 감정을 재평가 하자

읽다가 좋은 재료들을 발견했다.

재료1: 감정을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지말고 우선 수용하고 이해하자

재료2: 관찰자 입장에서 감정에 호기심을 가져보자

재료3: 좋다, 나쁘다식의 판단에서 벗어나, 익숙하다, 불편하다로 바꿔서 생각해보자

재료4: 사건에 대한 감정을 억지로 바꿀 순 없다. 깊은 곳까지 탐구를 한 후에야 가능하다.

마음챙김에 관한 기술들이다.

감정에 관련된 마음챙김 기술이니, 재료들을 당장 내일부터 적용해봐야겠다.

특히 허무하거나 힘듦의 감정이 올라오면, 옳다구나!라고 외치며 반겨주며 정말 호기심있게 관찰해봐야겠다.

끝으로 개개인은 저마다의 주관적 세계가 존재한다.

이에 객관성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열을 올리는 것은 자연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다.

앞으로는 "저자는 이러이러한 주관적 경험이 짙을 뿐이구나"라고 넘어가자.

사사건건 말꼬리를 잡으며 코치코치 비판하는 것은 나에게도 무척 해롭기 때문이다.